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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여성의 큰 별, 정부인의 ‘精氣’ 서리다

종가를 찾아서⑤ “이웃의 곤궁(困窮)함은 곧 나의 근심이니...”

“정부인은 그야말로 교육가요, 인격가요, 효녀요, 현부인이요, 학문가요, 예술가로서 한국역사상 많은 여성들 가운데서 가장 모범적이요 대표적인 분이다.”-김형수(1972), ‘석계부인 안동 장씨에 대하여’中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로 지정된 석계고택. 조선 인조, 현종년간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1590-1764)선생이 인조 18년(1640)에 세운 건물이다. 이 집은 일(一)자형 사랑채와 안채가 이(二)자형으로 배치해 토담을 막아 허실감을 매운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되어 있다.(사진/김락현 기자)


◇조선시대에 피어난 여중군자(女中君子)
#1. 임진왜란이 막 끝나가던 1598년 11월 안동 검재(금계리). 경당 장흥효 선생과 안동 권씨 사이에 외동딸이 태어났다. 장흥효는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당대 학자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장흥효는 퇴계 학풍을 이어 받은 학자답게 ‘몸을 삼가고’, ‘항상 공경하는 자세’를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그러한 집안 분위기 탓일까, 어린 소녀는 10세 정도 되는 나이에 <소학>과 <십구사략>을 깨쳤고, 13세가 되어서는 <몸가짐을 조심하다>, <소소한 빗소리>와 같은 주옥같은 시들을 지었다. 서예가로서도 빼어난 솜씨를 자랑했다. 그녀가 쓴 초서체 ‘적벽부’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이 ‘필체가 굳세고 강하므로 동방사람의 서법과는 같지 않으니, 중국 사람이 손수 쓴 필적이 아닌가?’라고 평할 정도였다.

이 어린 소녀가 바로 여중군자로 불리고 있는 정부인 장씨 ‘장계향’이다. 효행, 부덕, 문학, 예술 등을 겸비한 인물로 신사임당과 동등하게 칭송돼오고 있다. 역사 속 장계향은 혼자 사는 삶이 아닌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베풀며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했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음식디미방’이라는 세계최초의 한글 조리서를 썼다. 

장계향은 높은 학문적 소양뿐만 아니라 훌륭한 어머니이자 현명한 아내, 효성 지극한 딸로 살다간 진정한 여성군자이다. 재령 이씨 가문이 400여 년간 명문가로서 신망을 받아온 데에는 장계향의 역할도 적지 않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재령 이씨 집성촌)에 위치한 석계고택은 장계향이 남편인 석계 이시명 선생과 함께 1640년 이후부터 거처한 고택이며, 임종을 여기서 맞았다. 외관을 보면 여느 양반가의 고택에 비해 작고 소박하기까지 하지만, 이집에서 장계향이 만들어 낸 물질적·정신적 교훈은 실로 거대하고 엄청난 것이다. 

두들마을 내 위치한 장계향 기념관 내부 모습.(사진/김락현 기자)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실천한 삶
“부인께서 가는 곳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와 늙어서 자녀가 없는 사람과 늙어서 아내가 없는 사람과 늙어서 남편이 없는 사람과 늙어서 의지 할 곳 없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히 여겨 구휼하고 도와주기를 마치 남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심처럼 여기고는, 자신의 가난하고 곤궁한 이유로써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혹시 몰래 음식물을 보내주고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니, 이웃의 늙은이와 마을의 할미들이 모두가 그의 은덕에 감동하여 오래 살고 복 받기를 빌고서 죽어서도 반드시 은덕으로 보답하겠다고 축원하는 사람까지 있게 되었다.”

<정부인 안동 장씨 실기(實記)>에서 전하는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장계향은 애민(愛民)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고 전 생애에 걸쳐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鶴髮臥病 行子萬里 行子萬里 曷月歸矣(학발와병 행자만리 행자만리 갈월귀의) 
鶴髮抱病 西山日迫 祝手于天 天何漠漠(학발포병 서산일박 축수우천 천하막막)
鶴髮扶病 或起或 今尙如斯 絶裾何若(학발부병 혹기혹 금상여사 절거하약)

백발 늙은이가 병들어 누웠는데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보내네.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니 어느 달에나 돌아 올 것인가. 
백발 늙은이가 병을 지니고 있으니 서산에 지는 해처럼 생명이 위급하네.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서 하늘에 빌었으나 하늘은 어찌 그렇게도 반응이 없는고. 
백발 늙은이가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니 일어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네.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아들이 옷자락을 끊고 떠나간다면 어찌할 것인가. 

15세 때 쓴 학발시(鶴髮詩)에도 그의 애민 사상이 드러나 있다. 장계향의 동네에 살던 여든 살의 노파가 군역으로 떠난 아들을 기다리다 병을 얻어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지은 시다. 

영해지방과 영양지방에 전해져 오는 도토리를 통한 빈민구휼은 장계향의 애민사상의 실천을 그대로 보여준다. 도토리나무를 심고, 도토리 죽을 끓여 궁핍한 이웃 수백여 명을 구휼했다. 지금도 장계향의 시아버지인 운악 이함 선생의 묘소 부근 산지의 도토리나무 군락과 두들마을의 도토리나무 고목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또 어린 여종 돌봐 주기를 마치 자신의 딸처럼 해 질병이 발생하면 음식을 먹여 주고 간호해 온전히 편안함을 얻도록 했으며, 부리던 이들이 과실과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되면 조용히 가르치고 타일러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 감화해 복종하도록 했다. 때문에 남의 집 종들도 이런 일을 듣고서는 모두가 종이 돼 심부름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장계향의 인품은 이와 같아서 주위 사람들까지 모두 감동시키고 그들 또한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그녀처럼 착하고 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종부 조귀분(맨 오른쪽)씨가 디미방 회원들과 음식을 만들고 있다.(사진/김락현 기자)


◇340여 년 전, 요리 백과사전을 쓰다 
석계고택은 장계향이 현존하는 최고의 요리백과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나이 일흔 무렵에 눈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자손들을 위해 음식 하는 법을 정리해 남긴 것인데, 한문 실력이 뛰어난데도 후세들이 가까이 두고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글로 적었다.

음식디미방은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 곧 ‘음식의 맛을 아는 법’이란 뜻이다. 책은 앞뒤 표지 두 장을 포함해 총 30장의 필사본으로 돼 있으며, 국수, 만두, 떡 등의 면병류를 비롯해 어육류, 채소류, 주류, 초류 등 146가지의 조리 비법이 소개돼 있다. 

조선시대 여성이 책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도 문학작품만 남겼을 뿐 스스로 책을 집필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340년 전인 1670년경만 해도 요리책은 흔한 책이 아니었다. 특히 음식의 조리과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돼 있어 지금도 이 책을 따라서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 식품사의 권위자이자 고(古)조리서 연구가인 이성우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아시아에서 여성에 의해 쓰여 진 가장 오래된 조리책으로, 세계 음식문화사에 특별한 의의가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 만큼 이 책은 옛날과 오늘의 식문화를 비교·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이며, 거의 사라져 버린 옛 조리법을 발굴할 수 있는 지침서로서도 그 가치가 크다. 

◇“네가 한 가지 선(善)이라도 행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장계향은 19살 때 석계 이시명의 계처(繼妻)로 출가했다.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고 석계 선생의 전처소생까지 합해 7남 3녀나 되는 자녀들을 훌륭히 키우면서 교육이 엄하기로 소문이 났다. 장계향이 자녀교육에 있어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었다. 

늘 선하게 사는 것을 강조했다. 아들인 휘일과 현일이 집필한 <홍범연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늘 말하기를 ‘선행은 사람들이 다 하고자 하는 바이다. 지금 어린아이에게도 가리키면서 네가 착하다고 하면 아이가 기뻐할 것이고, 네가 착하지 못하다고 하면 아이가 성을 낼 것이니, 선행을 당연히 해야 할 것은 사람들 마음이 다 같이 그렇게 여기는 바이다.”

1692년에는 셋째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했는데, 그 대에 이르러 재령 이씨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장계향은 “너희들이 비록 글 잘 한다는 명성은 있지만, 나는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문득 기뻐하며 잊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며 자식들이 자만에 빠져 혹여 행신을 그르치지 않을까 늘 근심했다고 한다.

여성이면서도 군자란 칭호가 아깝지 않을 만큼 그 사상이나 철학이 훌륭했던 장계향. 문화관광부에서는 이러한 장계향의 생애 및 업적을 안정해 1999년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바 있다. 석계고택은 이러한 여성군자의 정기(精氣)가 두루 배어있는 상서로운 곳이다. 

종손 이 돈씨가 장계향 선생의 업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김락현 기자)


◇일상의 삶, 교훈이 되어 이어져오다 
장계향의 삶과 그가 남긴 교훈을 알리려는 움직임은 3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3대 종손 이 돈(75)씨는 장계향이 남겼던 유물 30여점을 되찾았고, 종가를 다시 지었다. 또 장계향이 문화인물로 선정되기까지 업적을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종부 조귀분(66)씨는 1년에 15번에 이르는 제사 때 마다 제물을 구입하는 과정부터 만드는 법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장계향이 후손들을 위해 ‘음식디미방’을 남겼듯이 말이다. 종부는 음식디미방보존회 회장을 맡아 가문의 음식을 이어오고 있으며, 석계 이시명, 장계향, 전처 광산 김씨 등 세 명의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불천위 제사 때는 떡만 10가지를 할 정도로 정성과 시간을 들어간다. 불천위 제사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후손들 뿐 만 아니라 관련 자치단체와 연구기관에서도 장계향의 업적을 알리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경상북도와 경북여성정책개발원은 2008년부터 장계향 아카데미, 워크숍, 장계향 전기문, 평전, 표준영정, 홈페이지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 왔다. 지난해에는 장계향 아카데미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사)여중군자 장계향 선양회가 발족하기도 했다. 

특히 경북도는 석계고택이 위치한 영양군을 북부지역 슬로우 푸드관광 거점지역으로 개발한다. 음식디미방 푸드스쿨 등을 조성해 음식아카데미를 운영하고 교육장, 체험시설 등으로 장계향 기념사업과 병행한다는 계획이다. 

◇석계고택
석계고택은 일자형(一字型)의 사랑채와 안채는 흙담으로 막아 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막힌 공간을 연출하면서 허실감(虛失感)을 메우고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다. 사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뒀으며 좌측에는 마구간과 창고방을 설치했다. 

사랑마루의 주위에는 판벽을 둘러 마루방으로 꾸몄으며, 후면에는 감실(監室)을 둔 삼량가(三樑柯)의 구조이다.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상방(上房)이 연접해 있다. 안방 옆의 마루면에는 판벽을 둘러 창고방을 설치했다. 홑처마 맞배지붕의 집이다.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91호로 지정돼 보존하고 있다.

  • 등록일 : 2012-08-31
  • 작성자 : 김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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